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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바다 - 오가와 요코: 기묘하고 오묘하지만 따뜻한 이야기

(gguro) 2013. 9. 21. 14:56

[책] 바다 - 오가와 요코: 기묘하고 오묘하지만 따뜻한 이야기


오가와 요코의 단편집 바다




지은이: 오가와 요코 小川洋子 おがわ ようこ

제목: 바다

옮긴이: 권영주





이렇게 플래그를 붙여두었는데,

읽은지 오래 돼서 왜 플래그를 붙여 두었는지 그 느낌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5월말에 읽었으니, 4개월 쯤 되었네.

(읽을 당시 짧게 써 둔 글)





단편집이라 여러 개의 이야기가 묶여 있다.


1. 바다

2.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3.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

4. 은색 코바늘

5. 깡통 사탕

6. 병아리 트럭

7. 가이드







1. 바다


26쪽

"제가 발명한 악기거든요. 제가 발명자고, 유일한 연주자예요."


명린금이라는 악기를 연주한다고 말하는 꼬마 동생.

꼬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장성한 남자.

주인공에게는 곧 결혼할 여자의 남동생.

주인공이 처가가 될 곳을 방문하면서 만나게 된 두 남자의 어색한 시간 속에 꼬마 동생이 던진 말이다.


대단한 악기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직접 만든 악기라는 설명에 읽으면서 약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2.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


36쪽

'옛 애인' 같은 낭만적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 고토코.

60대 중반의 미망인.

그리고 그녀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스무살 젊은 여자.

그 둘은 '옛 애인'을 찾아 떠난다.

일본인들이 오스트리아 빈까지 와서.





49쪽

요한 씨가 숨을 거둔 것은 우리가 빈을 떠나기 전날 오후였다.

명단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임종을 지킨 사람은 고토코 씨와 나, 둘 뿐이었다.


그랬다.

아는 사람 명단이라고 할만한 그 명단.

젊은 여자는

결국 고토코 씨와 함께 그녀의 옛 애인인 요한 씨의 죽음을 지켜본다.






50쪽

"고토코 씨, 이분, 요한 씨가 아니에요. 요슈아 씨인데요."


옛 애인인 줄 알고,

키스도 하고, 임종도 지켜본 그 사람이

알고보니 요한 씨가 아니었다.


옛 애인이 아니었다.

요슈아 씨였다.

그리고 진짜 요한 씨는 그 옆에 있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어이없고 허무하다.


그래서 재밌다.

한참을 거룩하고 경건하고 아름답고 심오한 이야기인 것처럼 그려내더니.


작가에게 한 방 먹었다.




3.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


57쪽

소장님 식으로 말하자면, 한 글자 틀린 게 세기의 발견을 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라고 붙여 두었네. 왜지... ㅡㅡ;;


내 논문을 인쇄하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세기의 발견.





75쪽

저는 활자판에서 활자를 하나 뺐습니다. 

새살 돋을 질[膣]입니다.

그리고 드라이버 끝으로 膣의 방旁에서 가로 막대기 중 하나를 깎아냈습니다.


남자인 활자 관리인을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 타이피스트가

일부러 활자를 망가뜨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망가뜨리는 활자가 좀 그렇다.

질. 




78쪽

이윽고 손가락은 깎아낸 자국에 당도하겠지요.

그곳에만은 특별한 애정을 쏟아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릅니다.

젖빛 유리가 떨립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전부 타이프 소리에 감춰질 테니까요.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여자 타이피스트의 느낌을 서술하면서 끝난다.

일부러 망가뜨린 활자를

활자 관리인이 애정을 쏟아 만져줄 것이라는 기대.

이런 형태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






4. 은색 코바늘

돌아가신 할머니와 기차에서 눈 앞에 앉은 노부인을 겹쳐보이는 이야기. 짧다.




5. 깡통 사탕

아이들에게 줄 사탕을 맛에 따라 구별해서 가지고 다니는 예순이 넘은 유치원 버스 운전사 아저씨 이야기. 짧다.





6. 병아리 트럭

107쪽

이건 분명히 선물이 될 만한 경이驚異라고 혼자 확신을 굳히기도 했다.

소녀에게 선물받은 줄무늬 뱀의 허물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받은 느낌을 묘사한 것이다.



116쪽

남자는 이것이 그녀가 주는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녀가 들려준 목소리.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만 주어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일을 겪고 말을 잃었던 소녀가 드디어 말을 하게 되는 장면.

그걸 선물로 받아들인다.

가장 소중한 선물로...




7. 가이드


125쪽

남은 우리는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엄마는 훌륭한 여행 가이드이지만,

정작 엄마 본인은 여행을 다닌 적이 없다.


그렇게 손님들을 받아 안내하고,

또 새로운 손님을 받고,

그러다보면 그 자리에 남은 그들은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는 말.


이 문장이 유난히 눈에 걸렸다.




134쪽

"지금 눈앞에 있는, 뭐든 다 해결해줄 사람이 우리 엄마예요."


주인공은 그렇게 외치고 있다.

마음 속으로 말이다.

자랑스럽게.




142쪽

"... 가게 이름은 '제목 상점'이라 한다만, 묘한 이름이지? 다들 들으면 이상한 표정을 짓더구나."


특별한 기억에 제목을 붙여주는 일을 한다는,

전직 시인이라는 아저씨.

할아버지에 가까울 것 같은 아저씨.

얼떨결에 일행과 동떨어져 가이드의 아들과 여행을 하게 된다.


저 제목 상점은 추억에 이름을 붙여주는데, 

[약지의 표본]이라는 같은 작가의 책을 보면,

무엇이든 표본으로 만든다.

주로 특별한 기억이 있는 것을 봉인한다.


오가와 요코는

뭔가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추억하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 같다.




154쪽

그다음 설명 포인트까지 잠시 여유가 있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남자가 조용히 풍경을 바라볼 시간을 만들었다.

남 이야기만 듣다 보면 손님도 지친다고,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글쓴이는 여행 가이드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이 책을 읽을 때, 캐나다 오타와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할아버지 가이드도 같은 말을 했다.

너무 쉬지 않고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일본이든 캐나다든,

여행 가이드들 사이에 통하는 게 있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나가며


이 책을 선물해 준 친구는

"기묘하고 오묘하지만 따뜻한 이야기"

라고 말했다.


참 따뜻한 이야기이다.

나는 특히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과 "가이드"를 재밌게 읽었다.

두 이야기는 

행복하면서도 너무 심각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가볍거나 무례하지도 않다.

잔잔하면서도 독특해서, 편안하게 즐겁다.




2013년 9월 24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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