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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낙하하는 저녁 - 에쿠니 가오리 본문
[책] 낙하하는 저녁 - 에쿠니 가오리
한 동안 책을 잘 안 읽다가 요즘 책 몇 권을 추천 받아서 읽고 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낙하하는 저녁.
▲ 이렇게 생긴 책이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유명한 에쿠니 가오리가 쓴 책이다.
"낙하하는 저녁"
제목만 봐도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완벽히 공감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남자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설정이 좀 무리해서 그런 것인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책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화자인 "리카"의 행동이나 여자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하나코"의 행동도 공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남자주인공인 "다케오"에 자신을 대입하기도 좀 어려웠다.
특이하다. 특별한 묘사가 많다. 섬세하고 세밀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전체적인 장면이나 각 등장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심리묘사나 상황묘사가 꽤나 특이하고 재미있다.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지만, 이런 기회에 읽어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독서에 조금의 다양성이 생겼다고나 할까.
내 책 후기가 늘 그렇듯 읽으면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글귀를 모아보았다.
▲ 난 책을 읽을 때 인상적인 글귀가 있는 곳에 이렇게 플래그를 붙여두는 습관이 있다.
"어디로?"
되물은 나의 말이 태평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설마 다케오만의 이사 - 나와의 헤어짐 - 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별로 시작한다. 여자는 이별을 상상도 못 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태평스럽다.
8년.
물론 그것은 상당히 오랜 세월이다. 알았어, 란 한 마디로 끝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달리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이별은 간단했다.
다케오를 꼭 껴안고, 있는 정열을 다해 섹스를 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이별이 현실이 아닐 거라고 몸부림치는 모습 같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이해하긴 어렵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답고 - 청순한, 이란 형용사를 모양으로 빚은 듯한 웃음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긴 여자의 눈에도.
이게 화자인 리카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여자인 하나코(華子)를 만나고 느끼는 첫인상이다. (하나코를 한자로 하니 화자네. 흠...)
그러나 나나 다케오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나코의 등장으로 달라진 상황을 공기가 뒤틀린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냥 듣고, 느끼고 싶었다. 다케오의 목소리, 다케오의 기척. 설사 그것이 하나코와 또 하나코와 또 하나코의 얘기일지라도.
하나코와 또 하나코와 또 하나코의 얘기.
이런 느낌은 또 뭘까. 정말 그러고 싶을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던,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듣고 싶을까.
"응. 그런데 그때 하나코의 차림이 아주 묘한 거야. 토끼 소녀처럼 토끼 귀를, 아, 옷은 아니고. 옷은 그냥 블라우스에 치마. 치마는 길이가 길고 수수한 색이었어, 풀색이라고 하나?"
이건 다케오가 처음으로 하나코를 만났을 때 하나코의 모습을 전 여자친구인 리카에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이게 다케오의 눈을 사로잡은 하나코의 모습이었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아니면서 미장원을 찾아 머리만 감는 것을 좋아한다.
참 특이한 성격이다. 이런 문장을 보면 글쓴이는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면 글쓴이의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나? 세밀한 취향 묘사가 인상적이다.
다케오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책을 읽는 것보다 다케오에게 가까운 일이었다. 적어도 다케오와 관계 있는 일이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나코가 갑자기 리카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재워달란다. 근데 그걸 재워준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코에게 줄 샌드위치를 만든다. 이건 참 이해 안 되는 정서인데, 이런 거 이해되는 사람 있나? 흠...
전체적으로 더할 나위없이 균형잡힌, 자그마한 몸집,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샌드위치를 집어, 예쁘고 청순한 입으로 씹어서 오물오물 먹는 하나코는 도자기 인형 같았다. 매끈한 피부도, 오만한 생김새도.
리카가 다시 한 번 하나코를 관찰하고 있다.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여자를. 아무리 봐도, 여자가 봐도 예쁘기만 하다. 이렇게 예쁘다는 묘사를 통해 리카와 하나코의 특이한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
우리는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코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코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라.....
글쓴이가 또 한 번 읽는이를 설득하고 있다. 리카와 하나코가 함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고.
"지금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용감하게, 그렇게 말해 보았다.
참.... 용감하다.
하나코와 함께 있는 리카가 다케오에게 한 말이다.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그리고 이제 곧 다케오가 이리로 온다. 하나코에게 페로몬을 바바바방 뿜어내기 위해서.
이 부분이 가장 익살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바바바방 뿜어낸다니. 이 상황은 그리 즐거운 상황이 아닌데, 그걸 표현하는 말이 참 우스꽝스러우니.
나도 다케오를 좋아해요, 라고는 물론 말하지 않았지만, 말보다 더 직설적으로, 예를 들면 호흡 하나하나가, 깜박이는 눈 하나하나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등으로 다케오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보다 더 직설적으로......
이런 묘사는 참 특이하고 재미있다.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직설적인 호흡과 눈 깜빡거림이라.
나는 왠지 설레는 마음으로 아무도 모르게 요리책을 샀다. 8년이나 같이 산 남자인데.
이런 변화는 헤어진 다음에 오게 되었다. 설레임. 하나코의 등장으로 새롭게 느낀 감정.
남자란 남자는 모두 하나코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화자인 리카가 가르치는 남학생인 나오토가 하나코 누나의 근황을 궁금해하니까 리카가 속으로 한 생각이다. 남자란 남자는 모두 하나코를 좋아한다.... 작가도 좀 미안했나? 굳이 이렇게 문장으로 써주다니. 진짜 나오는 모든 남자가 하나코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느낌도 든다.
"엊그제 이혼했어."
카츠야 씨가 말했다.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참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혼. 큰 사건인데,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라니.
카츠야씨도 하나코를 좋아하다가 자기 부인과 이혼했다.
정말 남자란 남자는 모두 하나코를 좋아한다.
리카, 잘 지내고 있니?
지난주에 홍콩에 왔어.
[중략]
비행기표, 내 멋대로 들고 와서 미안. 하지만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까.
[중략]
- 하나코
황당하다. 리카의 비행기표를 하나코가 들고 그냥 홍콩으로 왔다. 이 대목에서, 사실 나는 다른 사람 비행기표를 들고 탈 수 있나? 이런 게 궁금했지만. 리카가 홍콩에 가지 않았고, 하나코가 사라졌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 비행기표를 하나코가 들고갔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특이한 성격이다.
어제까지 하나코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조용히 잠든 얼굴, 조용한 숨소리.
하나코가 한참만에 돌아왔는데, 그 하나코가 너무나 익숙하다.
하나코는 우습다는 듯이 내 말을 되풀이했다.
"리카 너는?"
하나코가 리카에게 물어본다. 다들 하나코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리카가 말하니, 하나코가 리카에게 하는 질문이다. "리카 너는?" 너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냐고. 나를 보고 싶지 않았냐고. 하나코가 이렇게 말하는 건 의외다. 누구에게도 미련이 없을 것 같이 행동하는데, 리카에게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냐고 굳이 물어보면서 확인 받고 싶어한다.
"나는 보고 싶었는데."
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하나코가 말했다.
이건 정말 의외다. 하나코가 누군가를 보고 싶었다고 직접 자기 입으로 말했다. 큰 변화다. 하나코가 처음으로 진심을 드러내는 장면 같아 보인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거야."
보고 싶으면 돌아오지 그랬냐는 리카의 말에 하나코가 한 대답이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그게 하나코의 생각이다.
도깨비니 무민 트롤이니 하는 가공의 생물 이름처럼 들렸다. 하나코의 동생.
하나코가 리카에게 자기 동생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자 리카가 한 생각이다. 하나코가 보통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인가. 표현이 재미있다. 도깨비. 무민 트롤. 무민 트롤이 뭔지 모르지만 무슨 이야기에 나오는 괴물 같은 거겠지.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
이 문장은 책의 속표지에 써있는 말이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했으니 뽑아두었겠지. 나는 내용을 보기 전에 이 문장을 보면서, 설마 다케오에게 직접 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케오의 옛 연인이 자기 친한 친구나 뭐 그런 사람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이 다케오에게 직접 한 말이라니. 이상한 말이다. 그러니 다케오의 반응도, "... 그야말로 이상한 말이로군." 이라는 반응이지.
"그럼, 너도 도망갈래?"
"......"
나는 이때만큼 짧은 시간에 무수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화자인 리카와 하나코가 사는 곳에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다케오, 카츠야, 카츠야의 전처.
그런데 도망가자고 한다. 하나코가. 함께.
정말 도망갈까?
사람이 찾아올 줄 알면서 도망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짜 도망가네. 허허.
하나코가 자살했다.
이 문장을 보고. 왜? 왜? 왜?
갑자기 왜?
하나코가 왜?
계속 이렇게 물었다.
하나코에게 나타난 변화를 나만 모르고 있었나? 읽는 동안 나는 하나코가 자살할 정도의 상황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하나코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나카지마 씨의 집에 있지 않다면, 나오토네 집에 있나.
하나코는 죽었다.
그런데 리카는 하나코를 찾고 있다.
어디에 있을까?
하나코가 알몸으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손목을 그었다는 것. 유서는 없었다는 것.
이제 리카가 조금씩 하나코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런 것일까?
하나코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하나씩 배워간다.... 고 하는 것이 맞을까.
"하나코만 왔어도, 장례식이 훨씬 더 재밌었을 텐데."
하나코의 장례식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리카가. 하나코의 장례식에 하나코가 오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니. 게다가 장례식에 재미가 있다는 건 또 뭔가. 이쯤에선 이런 특이한 대사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나도 글쓴이에게 어느정도 설득당한 것 같다.
럭비로 단련된 다케오다. 강간은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서서 두 팔로 다케오의 목을 껴안고 입술을 포개면서 같이 쓰러지려고 했다.
참 거친 표현이다.
화자인 리카가 남자친구 다케오를 쓰러뜨려보려는 장면이다. 왜 그랬는지 그 마음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나코가 죽었기 때문인가?
그리고는 이야기가 끝난다.
다케오와 리카가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암시를 주면서 끝난다.
내가 여기 따온 글에는 없지만, 특징적인 설정이 몇 개 있다.
일단 세븐업.
이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세븐업을 마신다.
요즘 팔려나?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선 안 판단다.
이렇게 생긴 물건인데.
그리고 해브어 나이스 라이프.
화자인 리카의 절친한 친구인 료코가 자주 쓰는 말이다.
책 전체에서 서너번 사용된듯하다.
저 말이 작가가 담고 있는 메세지인가 싶기도 하다.
책을 추천해준 이는 "하나코가 더 아릿했다"고 한다. 아릿하다는 말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아리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네. 하나코에 감정이입하며 읽었나보다.
줄거리와 구성면에서, 나에겐 쉽지 않은 책이었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재밌는 것이 많았다. 그만큼 인상적인 글귀도 많은 거겠지.
끝.
2013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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