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로네

여보야의 기도 본문

이런저런 이야기/기도

여보야의 기도

각시야 2012. 9. 27. 21:09

언젠가 내 마음 속으로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나를 사랑하고도 그 힘이 남아서
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리고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남아서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한 동안 잊어버리고 지냈던 기도인데,
지난 주 설교 말씀이 이와 비슷한 내용이어서 이 기도가 다시 생각났다.


설교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2007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 가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며, (자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부모의 이야기)
자기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며,
자기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며, (잔다르크, 유관순)
전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테레사 수녀)

나의 기도는 사실 겨우 이웃까지였다.

사실 전 세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꼭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사랑하면서 살리라는 보장은 없다. 포함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있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 혹은 나와 적대적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오늘 한 번 더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나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기를.

사실 설교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나는 저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과 동시대에 사는 사람을 위해 살았고, 그 영향력이 아직도 어느 정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태어나고 살아갈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물론 사람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지만, 나의 사랑이 감히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기를 기도한다.

사실 저 기도의 순서 자체가 문제일지도. 나를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 또 그 다음에 이웃으로.. 사랑할 힘이 남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어쩌면 나와 관계없는 사람, 적대적인 사람부터 사랑하도록 애써봐야 하지 않을까? 아.... 잘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도 했는데...

Comments